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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 2023 세종도서 학술부문 (커버이미지)
    [사회]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 2023 세종도서 학술부문
    • 이경태 지음
    • 박영사
    • 2024-02-19

    2023 세종도서 학술부문이 책은 역사서이면서 픽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걸어온 길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서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를 세상으로 불러내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논하게 한다. 물론 두 거장이 나누는 얘기 속에는 저자의 상상이 날개를 펴고 있다. 저자는 2019년에 출간한 ��평등으로 가는 제3의 길��이라는 자전적 경제평론집에서, 자본주의가 효율성은 뛰어나지만 불평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논거를 제시하였고 평등한 노동자 세상을 꿈꾸었던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규명한 바 있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보강된 역사적 사실들과 풍부해진 저자의 상상력이 보태져 흥미와 유용성이 배가되었다.자본주의가 최초로 실현된 영국에서 노동자의 삶이 비참했는지, 나아졌는지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해 두 사람은 불꽃 튀기는 대립구도를 견지한다. 같이 여행하면서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데 평가는 정반대이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을 낙관하는 스미스와 자본주의의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제거하는 방법은 협동조합식 생산조직밖에 없다고 강변하는 마르크스 사이에 수렴은 불가능해 보인다.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작별하는 순간에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한다. 스미스는 마르크스의 평등 가치를 인정하고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생산력 가치를 받아들인다. 스미스는 자본주의에 평등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주주이익극대화를 대체하는 이해관계자상생을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에 효율의 마력을 갖추기 위해서 노동자의 자치적 생산조직인 협동조합을 주장한다. 어렵고 따분할 수 있는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저자의 혜안과 글솜씨 덕분에 독자들은 오늘날 세계가 껴안고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작업은 정치가나 학자들에게만 맡겨 둘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집단지성을 발휘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 책은 일상에 쫓기고 가진 것을 지키려고 집착한 나머지 공동체정신과 상생의 삶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우리들로 하여금, 더 소중한 것을 향하여 손잡고 일구어 나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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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 - 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들여다보는 테크 업계와 서비스의 이면 (커버이미지)
    [사회]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 - 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들여다보는 테크 업계와 서비스의 이면
    • 조경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12-27

    “기술과 여성이 만나면 이런 비판과 통찰그리고 이런 희망이 가능하다!”테크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소수자에게,결국 시민 모두에게 열린 기술을 모색하다“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에 여성 개발자로 태어나 쓰고 싶던 책이 바로 여기 있다. 기술과 인간의 공존을 원한다면 이 책부터 읽어야 한다.”- 임소연(《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지은이,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조교수)챗GPT의 공개로 인공지능의 새 시대가 열린 것처럼 보이는 지금, 기술진보가 다시 한번 세상을 바꿀 기세다. 이에 편승해 ‘빅테크 기업’의 주가가 다시금 상승세를 타고 있고, 많은 사람이 최신 기술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궁리를 거듭하고 있다. 기술이 공기처럼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시대이니, 이런 현상이 펼쳐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IT 서비스와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테크 기업을 다른 시선으로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여성 청소년들이 랜덤채팅 앱 때문에 피해를 입어도 서비스 제공 업체들은 ‘기술의 중립성’ 뒤로 숨는다. 여성들이 젠더폭력에 맞서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해놓아도 국가기관은 이를 방치하기만 한다. 테크 업계는 ‘압박을 견뎌내는 것도 능력’이라며 가혹한 노동환경을 개인이 돌파해야 할 몫이라고 강변하고, 남성 엔지니어들의 독성 말투와 여성 개발자 차별을 ‘실력’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한다. 기술을 ‘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바라볼 때 우리 앞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는 테크-페미 활동가인 지은이가 여성-노동자로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엮은 테크 업계 관찰기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가 테크 업계와 IT 서비스 바깥으로 밀려나는, 말 그대로 ‘액세스가 거부되는’ 장면을 조망한다. 디지털 성폭력을 조장하는 IT 서비스, 터무니없이 부족한 젠더데이터, 테크 업계에 만연한 독성 말투와 48시간 안 자고 일하는 게 당연한 근로조건까지, 서비스 최적화를 위해 배제되고 희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들여다본다. 독자들은 테크 업계에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모두를 위한 기술’을 새롭게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1. 기술은 결코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본 IT 서비스지은이는 SI(시스템 통합) 업무를 진행하는 기업에 입사해 개발자의 길로 들어섰다. 전공보다 현장에 대한 이해와 고객사와의 소통능력을 우선시하는 채용 방침에 따라 들어온 테크 업계는 날 선 말투, 이른바 ‘독성 말투’가 횡행하는 곳이었다. “이런 것도 모르면서 개발자라고 할 수 있나요?” “이건 어차피 안 돼요.” “아무튼 못 합니다.” 업무 중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도 ‘압박을 견뎌내는 것’도 모두 능력이라면서 개발자들의 독성 말투를 당연시했다. 지은이는 실적 중심, 남성 중심의 직군에서 드러나는 독성 말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이를 무조건 개인의 인성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압박을 견뎌낼 것을 강요하는 개발자 문화와 이에 동조하고 활용하는 성과 중심의 조직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IT 서비스가 젠더 문제에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IT 서비스를 어떻게 설계해야 성평등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보다, 수익성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에만 집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랜덤채팅 앱이 대표적으로, 익명의 사용자와 무작위로 매칭하는 이 서비스는 위기청소년을 꾀어내 성착취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또한 현재 IT 서비스의 핵심적인 자원이라 할 수 있는 데이터도 편향적으로 걸러지고 있다. 2022년 신당역 여성 살인 사건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발했지만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가해자가 얼마든지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발생했다. 판사가 구속영장을 기각한 데는 사회문화적인 편견도 작용했겠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데이터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범죄를 예방해야 할 국가기관이 젠더데이터를 충실하게 모으고 정리했다면, 판사가 데이터를 바탕으로 엄밀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면 사건을 막을 가능성도 높아졌을 것이다.이처럼 서비스를 어떤 관점에서 설계하고 운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의 해법이 도출된다. 문제는 해법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한다는 데 있다. 챗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챗봇은 방대한 대화 데이터를 바탕으로 문장을 생성한다. 공개 초기에 소수자 차별·혐오발언 문제를 노출했던 인공지능 챗봇은 이제 자체적인 윤리 규정을 두고 혐오발언을 걸러낸다. 그런데 부적절한 언어를 걸러내는 데이터 레이블링 작업에 제3세계 노동자가 동원될 때, 폭력과 소수자성에 민감한 이들이 챗봇을 사용하면서 상처받을 때 비로소 ‘안전한 챗봇’이 가능해진다는 걸 생각하면 난감해진다. 그렇다면 IT 서비스가 발생하는 문제를 외면하거나 완벽한 서비스는 없다고 체념해야 하는 것일까. ‘모두를 위한 기술’을 위해서는 결국 현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실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새로운 서비스에는 새로운 위험성이 따른다. 인스타그램에 장소 태그가 생겨나면서 사이버 스토킹의 위험이 생겨나고, 페이스북에 ‘함께 아는 친구’가 노출되면서 프라이버시 침해 이슈가 떠오른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사진을 합성해 직접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하는 디지털 성범죄도 가시화되고 있다. 물론 모든 서비스가 처음부터 이런 사건에 사전 대응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서비스를 악용하는 사례가 보고되었다면 어떻게든 조치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한 순간, 서비스 제작자에게도 책임이 생긴다.- 〈02. IT 서비스에도 중립은 없다〉, 45~46쪽젠더데이터 공백은 신당역 역무원 살인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가 가해자를 고소하자 검찰은 즉각 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구속영장은 왜 기각됐을까? (…) 그러나 관행에 의거하지 않더라도 법원은 스토킹 범죄가 무엇인지, 왜 피해자들이 두려움에 떠는지, 가해자를 구속시키는 것이 왜 필요한지 ‘증명’하지 못한다. 여성 대상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가늠할 만한 데이터가 사실상 공백에 가깝기 때문이다. 젠더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보고되었지만 수집하지 않았기에 없는 영역이다.- 〈04.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젠더데이터가 필요하다〉, 66~67쪽2. 48시간 정도, 안 잘 수 있나요?― 업계 한복판에서 체감하는 테크 노동의 현실우리는 보통 개발자 하면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남성 노동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개발 작업에는 예상보다 많은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게다가 기획, 디자인, 프로젝트 운영과 관리까지 시야를 넓히면 여성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개발 영역에서 남성의 비중이 높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오직 남성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또한 편견이다. 지은이가 개발자에서 ‘개발진’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테크 업계의 남성 중심성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정작 현업에 있는 여성을 지워버리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 노동자를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여성 노동자의 존재감이 테크 노동의 현실에서 흐릿해지는 데는 테크 업계의 너무나 열악한 근로조건도 한몫한다. 한 회사의 사내시스템 운영부서에서 면접을 본 지은이는 그날 들은 한마디를 잊지 못했다. “48시간 정도, 안 자고 깨어 있을 수 있으신가요?” ‘크런치 모드’라 불리는, 말 그대로 명줄을 갈아 넣는 고강도 노동을 하지 않으면 경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압박은 대규모 채용과 해고를 반복하는 업계의 관행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른바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라 불리며 국내 테크 업계 서열의 상층부에 자리한 기업들은 ‘실력’을 확인한다는 명분으로 구직자들에게 실제 개발과는 거리가 먼 코딩테스트와 사실상 무급노동이나 다름없는 사전과제를 요구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겨우 입사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테크 기업의 경영자들이 낙관주의에 빠져 사업의 비전을 주장하고 난 뒤, 부진한 실적과 악화되는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은 결국 대량 해고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중단되는 서비스의 시간주기가 테크 업계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셈이다.그럴 때 테크 노동자들이 선택하는 것은 끊임없는 공부다. 수시로 바뀌는 개발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개발언어를 강박적으로 학습하고, 테크 컨퍼런스에 꼬박꼬박 출석해 정보를 공유한다. 개인시간의 50%를 업무 관련 자기계발에 쓰는 사람, 컴퓨터공학 전공을 이수하기 위해 방송통신대에 등록하는 사람도 있다. 개발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이토록 분투하지만 출산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는 만성적인 시간빈곤에 시달린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확산된 유연근무제는 얼핏 시간빈곤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를 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연근무는 일과 가정을 양립시킨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여성 노동자가 일-가정-학습을 ‘삼립’해야 하는 상황을 고착시킬 뿐이다. 테크 노동의 현실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합의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개발자가 아니라 개발진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대할 때, 개발진의 성비는 어떻게 달라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처참한 개발자 성비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이는 단순히 숫자만 다르게 셈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확장을 꾀하는 일이다. 우리는 테크 산업 안의 여성들을 더 다채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일터에 있는 여성들을 지워 내지 않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도록.- 〈09. ‘개발진’으로 시선을 옮길 때 드러나는 존재들〉, 145~146쪽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말에는 좀 더 복잡한 속내가 들어 있다. 테크 업계는 사회가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항상 접속해주기를, 무언가 올려주기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를. 방향성은 나중에 결정해도 된다는, 일단 서비스가 성공 가능성을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는 낙관주의에 맹목적인 한, 우리는 서비스가 불러일으키는 영향력에 무감해지고 무책임해진다.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테크 업계 노동자들조차 마찬가지다.- 〈12. 왜 테크 업계는 대량해고를 밥 먹듯 할까〉, 186~187쪽3. 시스템이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모두를 위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유지보수하는 마음IT 서비스와 테크 업계의 이면을 여성의 시선으로 들여다볼수록 그 속에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가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이 정말로 더 가치 있는 일이냐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두가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만 몰두할수록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진다는 사실이다.서비스의 생산주기가 빨라질수록 노후화된 개발언어도 서비스도 늘어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유지보수다. 낡은 부분을 손보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을 높이는 작업이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지은이는 오래전 선배에게 들었던 말 한마디를 오래 기억한다. 시스템은 그릇이기 때문에 개발자는 그릇에 무엇이 어떻게 담기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이미 만들어진 서비스라는 그릇을 깨끗하게 다듬으면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할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고려를 넘어 사회적인 영향력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진이 새로운 상품의 개발이라는 측면만 볼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생산물을 어떻게 만들어내야 할지 고민할 때, 무엇보다 소수자의 관점으로 서비스를 개발하고 점검하며 유지보수할 때 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서비스가,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기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아무도 컵을 씻지 않는다면 어떨까. 누구도 거리를 청소하지 않는다면.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사람도,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고치는 사람도 없어진다면. 대륙을 끊임없이 횡단하는 설국열차조차 어린아이가 노동하지 않으면 금세 멈춰버릴 만큼 허술하지 않았나. 어쩌면 나는 바로 그런 장면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유지보수되지 않아 모든 것이 멈춰 섰을 때, 우리가 미처 몰랐던 노동을 발견하는 한순간을, 노동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로소 떠올리는 시간을.- 〈나가며_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유지보수한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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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는 무지개집입니다 - 한 지붕 퀴어 대가족 (커버이미지)
    [사회]여기는 무지개집입니다 - 한 지붕 퀴어 대가족
    • 김현경.나영정.정현희 엮음, 가족구성권연구소 기획
    • 오월의봄
    • 2024-02-19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누구나 가지고 있잖아요”나의 집과 나의 가족을 찾아서열다섯 퀴어와 다섯 고양이, 5층집 짓고 대가족을 이루다!서울시 마포구 망원동의 한 골목, 열다섯 퀴어와 다섯 고양이 대가족을 품은 성소수자들의 공동주택 무지개집이 5층집 위엄을 뽐내며 서 있다. 무지개집에 모인 퀴어 대가족은 성소수자의 삶을 가로지르는 혐오와 주거불안이라는 복합적인 난관을 ‘문란한’ 돌봄과 협동조합 주택으로 마주해보자고 나섰다.‘집’과 ‘가족’은 많은 이에게 더없이 평온하고 안전한 장소이자 관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성소수자들에게는 원가족 그리고 그 원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 억압과 폭력에 물든 장소이자 관계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또한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사회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따라 나의 집과 나의 가족을 찾아 모여 살고 함께 살고 싶다는 꿈은 적지 않은 퀴어들에게는 언제나 있었던, 꽤나 오래된 바람이었고, 그러한 바람에서 촉발된 다양한 움직임이 성소수자커뮤니티 내에서 꾸준히 나타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지역공동체 성격의 모임인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결성되었고, 2011년과 2013년에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를 주축으로 한 총 2회의 퀴어타운 프로젝트가 진행되기도 한 것이다.무지개집의 시작 또한 그 오래된 바람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자타 공인 무지개집의 기획자로 여겨지는 재우는 무지개집 프로젝트에 착수한 2014년 이전까지 서울시 북아현동, 연남동, 서교동 등에서 다른 퀴어들과 함께 모여 살았다. ‘가까이 사니까 좋다’는 경험들이 쌓인 덕분에 무지개집에 대해서도 ‘지금 해보자’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재우형이 ‘그냥 지금 해보자’라는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아요. 기다릴 것 없이 지금 해보자, 살아보다가 아닌 것 같으면 다 나오게 되더라도, 한번 해보면 다음에 더 잘할 수 있으니까. 늙어서 모이는 것보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모여 사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얘기를 꺼냈던 것 같아요.” (동하) (37쪽)집주인도 세입자도 없는 집사는(buying) 집이 아니라 사는(living) 집무지개집은 처음부터 그 정체를 가감 없이 드러낸 집이다. 지을 때도, 짓고 나서도 무지개집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외부에 이 집의 존재와 의미를 알렸다. 이런 점에서도 무지개집은 충분히 ‘별종’ 같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집이 너무나 당연한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무지개집은 협동조합 방식을 택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사회의 문법으로 보기에도 무지개집은 ‘별종’이다. 무지개집 사람들 중에는 집주인도 세입자도 없다. 이들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조합원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을 공통적으로 가진다. 주택의 사회적 소유를 실현하기 위해 공동주택을 짓는 함께주택협동조합의 조합원. 이에 따라 ‘함께주택 2호’는 무지개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무지개집의 ‘소유자’를 따지자면 함께주택협동조합이고, 무지개집 사람들은 조합원으로서 일정 금액을 출자해 집을 짓고 이를 공유하는 ‘공유자’들인 셈이다.이들은 처음부터 성소수자 공동주택을 꿈꾸고 모였기에 설계부터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무지개집 프로젝트를 위한 초동모임이 있었던 2014년 11월부터 무지개집이 완공된 2016년 4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40회 이상의 회의와 각종 워크숍이 진행됐다. 저마다의 욕구가 얼마나 다양했을 것이며 그 다양한 욕구를 풀어내고 조율해가는 과정은 또 얼마나 소란했을까. 이 대가족을 구성하는 이들이 저마다 꿈꾼 ‘집’에 대한 이야기와 실제로 무지개집을 구성하는 공간 곳곳을 들여보다 보면 새삼 ‘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서로의 집이 되는 사람들무지개집이라서 다행이야무지개집 사람들이 ‘내 집’이라 말할 수 있는 공간은 3평에서 10평 남짓, 개인공간으로만 치자면 무지개집 사람들은 모두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대신 무지개집에는 공용공간이 많다. 1층에는 식당, 극장, 운동, 회의까지 다방면으로 활용 가능한 ‘흥다방’이 있고, 1, 3, 4층에는 공용세탁실이 있다. 옥상은 물론이고 1층 대문 옆에 자리한 작은 마당도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공용공간이다. 갈 곳 없는 성소수자를 환대하는 게스트룸까지 있다. 협소한 공간임에도 집을 사는(living) 곳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이 모인 결과다. 공용공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이 집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각 주거공간의 보증금과 사용료를 계산하는 방법도 별나다. 공간의 크기를 따지는 부분이 없지야 않지만 구성원의 현실적인 상황을 더욱 고려하며 유동적으로 주거비용을 조정한다. 각 층의 보증금과 월 사용료는 당초 회의를 거쳐 책정해두었지만 반드시 고정된 건 아니다. 평당 얼마라는 계산법보다 중요한 건 성소수자 주거불안을 해소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함께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그럼에도, 성소수자라는 것 빼고는 사소한 습관부터 성격까지 모든 게 다른 15명이 함께 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단순히 한집에 모여 산다고 해서 저절로 친밀성이 쌓이고 돌봄이 이뤄질 리도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친밀감도 제각각이다. 특히나 비교적 각 가구가 구분된 생활공간으로 이뤄진 다른 층과 달리 6명이 5개의 방에 나눠 살며 부엌, 거실, 화장실, 냉장고 등을 공유하는 2층 셰어하우스의 공동생활 난이도는 최상이다. 2층 회의에서는 화장실에서 쓰는 휴지 양, 제대로 닦이지 않은 냉장고 속 얼룩도 안건이 된다.수시로 서로의 감정을 살피며 대화하고 조율하는 과정 속에서 관계는 또 하나의 노동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나날. 그럼에도 더 이상 나를 감추거나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나로서 온전히 존중받는 관계와 함께 사는 고양이들까지 고려해 설계한 집이 주는 물리적 만족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안전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느낀다. 다 같이 모여 김장을 하고, 창틀로 새 들어온 빗물을 퍼내고, 한여름날 수영장에 가고, 서로의 고양이를 돌보는 일상의 실천 속에서 ‘가족’이라는 말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무지개집에서 무지개마을로,담장을 넘어볼까?비로소 집에서 숨 쉴 수 있게 된 무지개집 사람들은 숨 쉴 수 있는 공간의 확장을 도모하기도 한다. 무지개집을 넘어 무지개마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꺼이 ‘불온한’ 이웃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것이다.“서교동에 살 때는 그냥 여기 나 혼자 사는 곳이고 마을주민으로서 정체성이 전혀 없었어요. 난 그냥 동사무소 갈 때만 서교동 주민이었지. 무지개집에서 15명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좀 보여주고 싶다, 이 마을에 어울려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좀 있어요. 사실 비밀로 살아도 되는데 우리끼리.” (재우) (134쪽)무지개집 사람들이 이웃을 만들기로 결심한 데는 망원동이라는 동네의 특수한 성격이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무지개집이 망원동에 자리잡은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꽤 오래전부터 망원동은 문화적으로 성소수자 친화적인 동네였다. 지역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으며 인권단체 사무실도 적지 않다. 동네를 거니는 이들에게서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듯한 냄새가” 나고, “머리를 빡빡 민 아기 엄마가” 살며, “그런 모습을 뭐라 하지 않는 동네”라는 인상은 무지개집 사람들이 자신을 이질적인 존재로 느끼지 않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이처럼 이미 어느 정도 ‘퀴어한’ 동네의 가능성을 믿고 이웃을 만들자고 나선 무지개집 사람들은 LGBT 번개와 바자회를 열며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고 관계 맺는다. 서울시 주관 공동체주택 아이디어 대회에 참여해 무지개집살이 이야기로 입상도 하고, 지역주민 노래자랑에 나가 성소수자 주민으로서 합창한다. 과거 단절되고 폐쇄된 공간이었던 집은 그렇게 이웃과 연결되는 기초가 되어간다.누구와 함께 살고 싶습니까?제도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처럼 무지개집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스며들어 더 이상 서로의 삶에서 분리되기 힘든 관계의 탄생이다. 하지만 제도는 이러한 관계를 포착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한다. 만약 통계상으로 무지개집을 본다면 이들은 어떻게 드러날까? 1인 가구들의 집합으로만 드러날 것이다. 그 안에는 실질적으로 파트너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일상적 돌봄을 주고받고 서로의 위기를 방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도는 이러한 관계를 철저히 외면한다.정상가족과 이성애중심적인 가족제도는 주거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한국의 주거정책은 취업-연애-결혼-출산이라는 특정 생애주기와 삶의 형태를 ‘정상’으로 상정하고 추진된다. 이에 따라 주거불안 문제의 해결책 또한 1인 가구, 신혼부부 가구, 노부모 부양 가구를 중심으로 마련된다. 그마저도 충분하지 않은 실정이지만, 빈약한 주거정책 속에서 혈연이나 결혼 아닌 방식으로 유대하고자 하는 이들은 제도로부터 완벽히 배제되고 있다.무지개집이 말하는 주거안정은 단지 머물 곳을 마련하거나 집을 소유하는 데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차별에 부딪혀 고립적인 생활을 하는 성소수자에게 주거안정이란 때로 시급한 생존의 문제다. 서로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식인 같이 살기”(179쪽)가 무지개집에서 이뤄지고 있다. 가족은 법적 규정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나의 존재와 관계가 오롯이 존중받는 장소로서의 집이 실현 가능하다는 걸 무지개집은 생생하게 증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상과 실천을 가로막는 제도적ㆍ사회적 장벽을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함께 살고자 하는 관계,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얼마든지 더 다양할 수 있다.* 공동 저자김순남 ∘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퀴어/페미니즘 연구자이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2022, 오월의봄)를 썼다. 난잡하고 오염된 공동체를 꿈꾼다.박서연 ∘ 1인 가구 노인이 시설 아닌 자신의 집과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돌봄안전망을 만드는 지원주택에서 근무한다.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 활동했다.성정숙 ∘ ‘함께 함’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사회복지연구자.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사회복지연구소 ‘물결’ 공동대표이기도 하다.유화정 ∘ 가족구성권연구소 활동가. 주요 관심 분야는 젠더/폭력, 가족/관계, 친밀성 실천이다.이종걸 ∘ 솔로 게이 몇 년 차인지도 모른다. 돌봄은 나로 족했다. 그런데 가족구성권연구소 활동 좀 하다 보니 그게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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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易과 모퉁이의 신학 - 육성으로 듣는 이정용 박사의 삶과 신학 이야기 (커버이미지)
    [사회]역易과 모퉁이의 신학 - 육성으로 듣는 이정용 박사의 삶과 신학 이야기
    • 이정용 지음, 임찬순 엮음
    • 동연출판사
    • 2024-02-19

    “이 책을 통해 부활하는 이정용의 삶과 메시지는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신학과 영성의 빈곤 시대에 쉼과 평화를 주는 나무가 될 것이며, 그 아래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기운을 선사할 것이다.”이 책에서 임찬순 박사가 묶어 낸 이정용 박사의 육성은 그의 학문적 공과 신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동양적 해석학을 다루면서도 한국적 신학과 영성의 숨 자리를 다양하게 접근해 온 이정용의 학문 여정은 더욱 정진하고 다듬어가야 할 우리의 신학적 과제를 제시한다.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운 때에 있다. 과연 누가 이정용처럼 동과 서, 신학과 목회, 정의와 평화, 하늘과 땅, 그리고 소외되고 밀려난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그렇게 치열하게 해냈는가? 역사적인 애환과 갈등 한복판 이민자의 척박한 광야 길을 걸어간 이정용은 스스로 주변인을 자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소명으로 자기 개혁을 살아낸 선각자였기에, 지금 그 신학의 폭과 깊이의 공명이 더욱 웅장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책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이정용의 육성은 우리 시대에 절실한 신학하는 사명을 가진 목회자들과 교회에 주는 진정한 ‘살아내는 신학’(Doing & Living Theology)의 지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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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벽한 피해자 - 이 여성을 위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커버이미지)
    [사회]완벽한 피해자 - 이 여성을 위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 김재련 지음
    • 천년의상상
    • 2023-12-27

    성폭력에 대한 편견과 싸워온여성 인권 변론 20년, 그 만남과 성찰 1. “성폭력에 대한 견고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습니다” ― 성적 자기결정권, 가해자 중심주의, 성인지 감수성이란?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 김재련은 지난 20년간 여성 인권 변론 현장을 지켜왔다. 성폭력, 가정폭력, 결혼이주여성, 아동학대 사건 변론을 1,000건 넘게 맡아 왔으며, 그중 600여 건은 무료법률구조 활동이었다. 그런 김 변호사지만 법조인으로 활동하기 전까지는 여성 차별을 거의 체감하지 못했다.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나 가족들 사랑을 듬뿍 받았고, 여고, 여대를 다녀서 성차별 상황에 부닥친 일도 거의 없었다. 사법연수원 2년 차 시절, 우연찮게 변호사 시보 생활을 두 달간 했던 대학 선배의 제안으로 함께 일하게 된 게 김 변호사의 삶의 행로를 결정하게 된다. 한 달에 많게는 80건이 넘는 가사 사건들을 담당하면서 여성 차별과 인권 유린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대생 성추행 사건, 태권도 사범 미투 사건을 비롯해 많을 때는 한 해 100건 넘는 무료법률구조사건을 맡아오면서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성폭력과 그 피해자들에 대한 숱한 편견을 겪었고 이에 맞서 왔다. 이 책 『완벽한 피해자』를 쓰게 된 것도 그러한 편견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런 편견 중 하나가 책 제목이기도 한 ‘완벽한 피해자’라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허상이다. “피해자라면 성폭력 피해 입은 후 가해자 집에 놀러 갈 수 있겠어?, 피해자라면 그다음 날 친구들이랑 나이트 가서 놀 수 있겠어?, 피해자라면 그런 일 겪고 SNS에 활짝 웃는 사진 올릴 수 있겠어?…” 이 모든 것은 양립할 수 있고, 사건 이후 삶은 피해자의 상황, 성향, 기질에 따라 다양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허상을 깬다.성폭력에 대한 편견은 이것만이 아니다. ‘증거를 가지고 오면 믿어 주겠다’고 짐짓 합리적인 척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은 애당초 객관적, 물리적 증거가 확보하기 어려운 게 특징이다. 그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이기 때문이다. 가령 단둘만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 의사에 반하여 가슴을 만졌다고 하자.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다. 그런데 가슴이 밀가루 반죽이라면 그 당시 형태 그대로 증거가 남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그래서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꼼꼼하게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 김재련 변호사는 바로 그래서 가해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고, 성인지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기보다 가해자의 의도나 상황을 우선 이해하려고 하고, 피해자에게만 피해 사실 증명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때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 말을 무조건 믿어주라는 게 아니다. 성과 관련된 사건을 상담하거나 수사하거나 재판하는 사람은 특정 단어나 장면을 근거로 판단하지 말고,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된 ‘앞뒤 맥락’을 꼼꼼히 살펴보라는 의미다. 이 책 『완벽한 피해자』에서는 20년 간 여성 인권 변론을 해온 김재련 변호사가 맡았던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편견들을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2. “당신은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켜낸 사람입니다”― 용기 있게 상처를 드러낸 여성들에게 띄우는 김 변호사의 편지 이 책의 저자 김재련 변호사는 20년 간의 여성 인권 변론 현장에서 만나왔던 피해자들 중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직장을 바로 그만둔 사람, 아무렇지 않은 듯 직장생활하고 가족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사람, 가해자 측의 형사합의 의사를 전달하면 혹시 변호사가 상대방과 모의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피해자…. 피해자도 부족한 게 많은 보통 사람이고 변호사도 흠결 많은 인간일 뿐이다. 이들 피해자들은 모두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재련 변호사의 모습이 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 한겨울에 사건 현장인 모텔을 찾아서 의뢰인과 함께 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이야기, 세쌍둥이 임신으로 빵빵한 배를 끌어안고 현장 검증하러 다녔던 사연, 10명의 피해자 기록을 가방에 가득 담고 지방 법원을 숱하게 왕복해야 했던 나날들. 어쩌면 이 책 『완벽한 피해자』는 김재련 변호사가 함께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아주 긴 편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 ‘나오는 말’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여성들에게 전하는 얘기들로 마무리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우선은 “저항은 당신의 권리이지 의무가 아닙니다”라는 말부터 전한다.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추궁한다. 죽기 살기로 저항하면 성폭력은 발생할 수 없다고 말하며 피해자를 의심하곤 하는 것이다. 죽기 살기로 저항하면 정말 피해자가 죽기도 하고 더러 그러다 가해자가 사망하기도 한다. 김 변호사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차라리 피해자가 성폭력의 순간에 저항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때론 무리한 저항의 결과가 너무도 가혹하고 그 결과를 피해자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책하지 말았으면 합니다”라는 당부로 이어진다. 많은 피해자들이 어렵사리 용기 내어 가해자를 고소한 이후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자책하곤 하는 걸 자주 봐왔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잘못을 말하고 제대로 처벌해 달라는 것은 당신의 권리라는 것. 자책은 가해자의 몫이어야 하며 당신이 할 일은 용기 있는 결정을 한 당신 안의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위로한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살아내야 합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친구를 만나고 즐겁게 여행 다니고, 클럽에 가고,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연애도 해야 한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피해자가 위축되지 않듯이 그 사고 기억이 피해자 삶을 삼켜버리지 않듯이 당신도 그 기억이 당신의 현재를 계속 지배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신은 당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켜낸 멋진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3. “마음의 문이 열려야 진실의 문이 열립니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수사관, 검사, 판사들이 가져야 할 태도 가해자만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법정에서 정의의 심판을 구하는 과정에서 때론 피해자들은 수사관, 판검사에게서 또 한 번 마음의 상처를 입곤 한다. 변호사 김재련이 이 책의 마지막 한 장을 할애해 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긴 것도, 피해자 진술 조사에 동석하고 법정에서 변론하면서 이들이 가진 편견과 무지에 숱하게 부딪힌 경험 때문이다. 가령 이런 사례들. 친아빠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어린 학생을 조사하면서 피해자에게 빨리 말해 달라고 재촉했던 수사관이 있었다. 왜 그런지 물으니, 돌아온 대답. ““빨리 끝내고 가서 마라톤 연습을 해야 해서요.” 어떤 악의도 없었다 해도, 그 수사관의 말에 피해자는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사 역량은 발 빠른 증거 수집 같은 실무 역량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그래서 ‘존중과 공감’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수사기법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례. 어떤 판사는 기소된 이후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에게 “증인은 여자이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남자친구도 사귀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 건데, 아빠를 고소한 사실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도 있다고. 이 책 『완벽한 피해자』를 쓴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자가 법정에 나왔을 때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덜 불편하게 끄집어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판사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긴 문장을 얘기할 필요도 없다. “오시느라고 고생했다. 힘들겠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고 이야기를 해줘라. 혹시 진행하는 중 불편하거나 힘든 질문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달라.” 이렇게만 얘기해도, 피해자는 존중받고 있다는 걸 느낀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게 수사기관과 법정은 또 다른 상처를 낳는 곳일 수도 있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현장일 수도 있다. 비록 시효 만료로 패소했지만, 이 피해자의 목소리는 승소와 관계없이 과정 자체가 치유의 힘이 될 수 있음을 증거한다. “판사님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사건 소송에서 제가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판결이 안 나왔는데도 제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 이야기, 그러니까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게 얼마나 제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제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판사님이 다 들어주셨고, 또한 법정에 가해자를 대신해서 나와 있는 가해자의 부인 역시 이 이야기를 다 들었기 때문에 저는 제가 이겼다고 생각합니다.”피해자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진실의 문이 열린다. 그 열쇠는 수사관과 검사, 판사가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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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롭지 않을 권리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커버이미지)
    [사회]외롭지 않을 권리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 황두영 (지은이)
    • 시사IN북
    • 2021-03-03

    2013년 10월, 부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여고 동창생 A씨와 40년 동안 함께 산 여성 B씨는 법률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온갖 수모를 겪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거인 A씨의 투병 과정에서 나타난 법정상속인 조카는 B씨를 집에서 쫓아내고 간병하는 것도 막았다. 결국 B씨는 A씨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했다. 뒤늦게 A씨의 죽음을 알게 된 B씨는 함께 살던 아파트에 올라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고민하게 한다.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살 수 없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혼인의 자유와 권리가 행복추구권이 실현되는 방식이라면, 혼인 외의 제도로 가족을 구성하는 것 역시 행복추구권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고독한 사람들</B>한국 사회에서 1인 가구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00년에 1인 가구는 15.5%를 차지했는데, 2017년에는 562만 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28.6%가 되었다. 2015년 이후 1인 가구는 대한민국의 가장 보편적인 가구 형태다. 사람들은 외롭다. 폭증하는 1인 가구를 자유와 낭만을 갖춘 트렌드처럼 꾸미지만 실제로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 너무 높은 결혼의 장벽,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이혼과 사별 등으로 어쩌다 보니 1인 가구가 되는 경우가 많다. 1인 가구 비율은 전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 혼자 사는 노인은 2000년 54만 4000가구에서 2017년 137만 1000가구로 증가하였다. 노인 인구 중 23.6%가 혼자 산다. 가난할수록 혼자 사는 비율이 높고, 혼자 살면서 겪는 어려움도 더욱 크게 느낀다. 안전망 부재로 발생하는 사회적 단절, 심리적 외로움, 고독사 등 사회 문제가 잇따라 발생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독한 상태가 되면 그것은 사회적 문제이자 정책적 과제이다. 지속적인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돌봄을 제공하는 자원이 필요하다. 혈연관계나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루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국가에 의존하는 돌봄서비스로 충분할까? 법 밖의 가족을 이대로 방치하면 될까? 한 집에서 서로를 돌보고 지키는 수준의 돌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서로 돌보며 함께 살겠다”는 약속국회에서 사회적 돌봄에 필요한 법과 정책을 연구해온 저자가 외로움을 해결할 대안으로 ‘생활동반자법’을 제안한다. 2014년부터 입법 논의가 진행 중인 생활동반자법은 생활동반자 관계를 맺은 사람이 국가에 등록하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복지혜택 등 법적 권리를 보장하고 둘 사이의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생활동반자법은 둘의 성별이나 같이 사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서로 돌보며 함께 살겠다”는 약속을 자발적으로 맺고 또 지키는지에 주목한다.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함께 살며 서로 돌보기’의 의무만을 가져왔다. 이 책을 쓰기 전, 저자는 1인 가구, ‘법 밖의 가족’ 당사자를 만났다. 여든인 노인 커플은 자녀들이 장성한 이후에 만나 십수 년을 함께 살았지만 상속과 연관된 가족관계가 복잡해지는 것을 염려해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나와 자립한 커플도 1인 가구로서 복지혜택과 부부로서 복지혜택을 고민하면서 혼인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만 하고 있었다. 사회적 인정을 원하는 동성 커플은 궁극적으로 동성 결혼 합법화지만, 생활동반자법이라도 있으면 대출이나 주택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데이트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연스레 동거를 하게 된 생계형 커플, 친구를 돌봐주려고 왔다가 수년째 같이 사는 동성 노인도 있었다. ‘누구와 사는가’ ‘누구와 살고 싶은가’를 둘러싼 사연은 매우 다양하고 결코 혼인과 혈연만으로 묶일 수 없다.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생활동반자법과 유사한 내용의 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1999년 시민연대협약인 팍스(PACS)를 도입해 동성, 이성 커플의 법적 권리를 보장했다. 동거 가구에 가정수당을 주고, 동거 관계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철저히 금지해 출산율 반등에 성공했다. 2018년 영국은 외로움이 흡연보다 더한 건강의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외로움위원회’를 구성했다. 우리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텀블벅 펀딩 1300% 달성‘이제야 나 하나 겨우 건사할 수 있는데, 결혼할 생각도 없고 엄두도 나지 않는데, 나는 이렇게 혼자 늙어 죽는 걸까?’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결혼제도 외의 동거 생활을 인정받지 못하는 차별적인 현실을 자각하고 생활동반자법 입법으로 조금은 달라진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출간 전 텀블벅에 소개한 『외롭지 않을 권리』는 목표 후원금의 1300%를 넘는 달성률을 기록했다. 많은 독자들이 생활동반자법 입법의 필요를 느끼고, 이에 반응한 것이다. 생활동반자법은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돌봄 공백을 메울 대안인 ‘외롭지 않을 권리-생활동반자법’으로 사랑과 연대가 피어날 ‘집 안’을 꿈꿀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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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커버이미지)
    [사회]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 마이클 린치 (지은이), 황성원 (옮긴이)
    • 메디치미디어
    • 2021-03-03

    무엇이 ‘사실’의 문제를‘확신’의 문제로 바꿔버리는가?현대 정치의 일부가 되어버린 오만의 문제를 탐사하다 </B>영어에는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노잇올(know-it-all)’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주변의 한두 사람쯤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책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명절 때마다 정치 이야기에 핏대 올리는 술 취한 삼촌이나 커피 마시는 것 하나까지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피곤한 친구에 관한 일화를 넘어서 우리의 정치적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더 나아가 문제의 핵심이 자리하게 된 ‘노잇올’, 즉 도덕적이고 지적인 오만함의 문제를 탐사한다. 정치가 좌파와 우파 사이의, 여당과 야당 사이의 줄다리기 싸움처럼 보이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촛불과 태극기 사이에서 거대한 심연을 느끼듯 그 어느 때보다 멀어 보인다. 둘 사이에 공통분모는 갈수록 적어지고 심지어 가장 하찮은 사안마저 논쟁과 의심의 대상이 된다. ‘가짜 뉴스’는 그저 내 맘에 들지 않는 뉴스를 일컫는 표현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후변화와 백신, 그리고 선거 결과 같은 ‘사실’의 문제까지 흔들리고 있다. 저자는 탈진실의 시대에 인간의 조건이 되어버린 오만함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깊숙이 탐사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확신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경멸과 우월감으로 무장한 채 파벌주의의 덫에 빠져버린 민주주의에 확실한 경종을 울린다. 진실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가짜 뉴스의 시대내가 믿는 것이 곧 ‘나’이다2016년 12월 에드거 웰치라는 남자가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워싱턴 DC의 한 피자 가게에 들어섰다. 인터넷 커뮤니티 〈포챈4chan〉을 중심으로 힐러리 클린턴과 다른 민주당 정치인들이 가게 지하에서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다는 뉴스가 떠돌고 있었다. 웰치는 이를 자체 수사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다. 지하에 아동 성매매 조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건물에는 지하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웰치의 행동이 터무니없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가? 저자는 가짜 뉴스의 시대에 정보가 오염되고, 오염된 정보가 기이한 자기 확신이 되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을 웰치의 사례에서 발견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하는 인터넷 기사 중 최소 60퍼센트가 그것을 공유한 사람마저 읽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우리는 특정 의견에 동의하거나 혹은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기사를 공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감정적 태도를 전달하기 위해, 특히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분노를 끌어내기 위해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이때 소셜미디어는 ‘바로 여기에 분노를 느껴라’라고 지시함으로써 파벌주의를 강화하고, 결국 ‘확신을 양성하는 신병 훈련소’가 되어버린다. 확신은 자신이 바라는 자아상과 관련이 있다. 확신은 그저 확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삶에서 권위를 갖는다. 그것을 뒤흔들 증거가 눈앞에 있어도 사실이나 논리 자체를 거스르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확신을 방어하는 것은 정체성 자체를 방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웰치의 우스꽝스러운 작전을 지켜본 극우 미디어는 그가 민주당에 의해 고용된 배우라는 주장을 유포하며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켰다. 이런 상황은 여전히 기이하지만 조금도 낯설지 않다. “트럼프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보다 똑똑하다”저자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불을 지피는 이 파벌적인 자기 확신의 진짜 문제는 거짓을 진실로, 혹은 진실을 거짓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진실이 무엇인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양산하는 데 있다. 세상에는 트럼프의 트위터를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공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트럼프가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류 미디어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는 사안을 트럼프가 기꺼이 입에 올린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트럼프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말할 때 분노, 억울함, 극도의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트럼프를 통해 그동안 무시당해온 감정과 과소평가된 경험들, 이를테면 기후변화는 사기라거나 이민자가 미국을 장악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비로소 재평가받는다. 우파의 확신이 기이하다면 좌파의 확신은 확실히 오만하다. 우파 사이에 대안적 위키피디아로 불리는 콘서버피디아에는 아예 ‘자유주의자의 오만함liberal arrogance’이라는 항목이 있다. “근거 없는 자만심에 가득 차서 건방지게 넘겨짚는 자유주의자들의 성향”으로 정의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실을 알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공감하고 배려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가정하에서 많은 좌파는 마치 모든 보수주의자가 잘못된 가치를 좇을 뿐 아니라 멍청하거나 속임수에 넘어간 게 틀림없다는 듯 행동한다. 자신만이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우월감만큼이나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오만함을 강화시키는 것은 없다. 오만함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무너진 공공 담론을 어떻게 바로세울 것인가?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은 그저 우리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옳으며, 더 이상 서로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좌우 양쪽의 스펙트럼을 넓게 조망하며 ‘우리는 틀릴 수 없다’라는 오만이 정치를 어떤 위기에 빠뜨렸는지를 탐사한다. 파벌적인 확신과 오만함은 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지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해롭다. 타인에 대한 경멸과 우월감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자기 관점이 우월하다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인간으로서도 우월하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오만한 사람들은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백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라고 쏘아붙인다. 혹은 멍청한 사람들이 정치를 수렁에 빠뜨린다고 비난한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이처럼 집요한 오해와 의도적인 경멸이 일상이 된 풍경 속에서 무너진 공공 담론을 회복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치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 질문을 바꿔 이제는 ‘우리는 어떻게 믿는가?’를 물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무언가가 사실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믿지 않듯, 우리가 믿는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과연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동시에 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한 가지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정치적 관점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약이 있다. 우리는 그 약을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 국회의원에게 주거나 상수원에 풀 수도 있다. 당신은 그 약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극단적인 종교적 대립 상황에 진저리치며 스스로를 탑에 유폐시킨 몽테뉴, 전체주의 시대 진리와 정치의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든 한나 아렌트를 경유해 다시 처음의 소크라테스 문답으로 돌아오는 여정 속에 저자의 답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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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 - 차별을 만드는 데이터, 기회를 만드는 데이터 (커버이미지)
    [사회]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 - 차별을 만드는 데이터, 기회를 만드는 데이터
    • 김재연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4-02-19

    천만 명이 다운받은 정부24 앱은 왜 쿠팡, 배민만큼 쉽고 빠르지 못할까?“데이터를 통해 모두가 더 쉽고 편하게 정부 혜택을 누리는 것,이것이 시빅 데이터Civic Data의 역할이자 목표다.”태어났지만 주민등록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 아기’ 2,236명, 오송 수해참사 희생자 14명, 이태원 참사 사망자 159명, 편의점에서조차 마음 편히 쓸 수 없는 급식카드 발급 대상 아동 28만 4,000명……. 이들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구, 교통, 의료, 교육 등 정부가 관리하는 공공 데이터로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문제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IT 강국이자, 주민등록번호와 지문을 포함한 국민의 개인정보 상당수를 국가가 관리한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자꾸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시빅 데이터의 개념과 활용법, 나아갈 방향에 이르기까지 시빅 데이터의 모든 것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책이다. 시빅 데이터란 ‘시민을 위한 데이터’를 의미한다. 복지뿐 아니라 행정 전반에서 시빅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면 모두의 일상이 더 쉽고 편해지는지, 정부가 시빅 데이터를 어떻게 관리하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할 수 있는지를 조망한다. 공직자의 편의와 업무 중심으로 설계한 정책과 데이터는 복지 사각지대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시민의 일상을 불편하고 짜증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시빅 데이터와 시민 간 공백은 약자들을 더욱 가난하고 아프게 만들고, 때로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고조차 막지 못해 귀중한 목숨을 희생시킨다.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 소속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이자 존스홉킨스대 SNF 아고라 연구소 연구위원이며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룰 역임한 저자는, 이 책에서 10가지 키워드를 통해 시빅 데이터를 설명한다. 시빅 데이터의 발전사부터 한국과 미국의 현주소, 미국의 다양한 시빅 데이터 활용 사례, 한국이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조목조목 꼬집는다. 또한 ‘공공성’에 대한 인식 개선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소개한다. 방대한 통계자료와 사례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은 ‘공공성’과 ‘테크’를 둘러싼 여러 논쟁과 편견을 해소할 뿐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고 기술은 사람을 보조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영감을 주는 다양한 인사이트를 제공할 것이다.넷플릭스, 멜론의 추천 알고리듬을 공공 영역에 도입하면, 정부 앱이 알아서 내게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추천해주면,우리 일상은 얼마나 편리해질 수 있을까?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제69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첫 장면에서 주인공 다니엘과 의료수당 지급 담당자가 주고받는 길고 답답한 대화를 보여준다. 평생 목수로 성실히 일해왔으나 심장에 문제가 생긴 다니엘은, 더는 일하지 말라는 주치의의 진단서를 제출하고도 의료수당 심사에서 탈락한다. 그는 항소를 결심하지만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나이 든 노동자에게 인터넷 회원가입, 공인인증서 발급, 수 분 이내의 접수 완료 같은 복잡한 절차는 매번 좌절감을 안겨준다. 두 시간째 연결되지 않는 통화대기음에 지쳐 직접 방문한 관공서에서는, 오늘은 마감되었으니 나중에 다시 오라는 건조한 안내를 받는다. 현실도 다르지 않다. 코로나19가 기승이던 시절, 스마트폰을 피처폰처럼 쓰거나 쓰지 않던 사람들은 ‘QR코드’를 찍지 못해 식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가게 입구에서 연락처를 적었다가 모르는 이에게 연락을 받은 사람도 있고, 입장하고도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하지 못해 돌아간 이들도 있다. 한쪽에서 앱으로 백신 접종을 예약할 때, 한쪽에서는 동네 병원마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야 했다. 지금도 명절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장 판매용은 티켓 자체가 많지 않거니와 창구도 겨우 한두 개만 열어둔다. 한국인 대다수가 개인 핸드폰을 쓰고 있지만 나이, 지역, 경제적 수준, 핸드폰 기종 등에 따라 각자 체감하는 공공 서비스 문턱의 높이는 천차만별이다. 빈부 격차나 세대 차이와 상관없이 국민 모두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문제도 있다. 5,000여 건의 민원 서비스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공공앱 ‘정부24’의 경우, 구글플레이 평점이 5점 만점에 1.7점이다. 시민들이 제법 활용하는 앱의 평점이 이 정도다. ‘로그인이 되지 않는다’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도 자주 발생한다. 부처별, 지자체별로 실적을 채우기 위해 저마다 공공앱을 개발하지만 정작 시민들은 존재 자체를 모른다. 담당자들도 출시 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예산만 낭비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2017~2021년까지 폐기됐거나 폐기 예정인 공공앱만 총 635개, 개발비는 188억 원이 넘게 투입됐다. 이중 다운로드 횟수가 1회 미만 공공앱만 무려 267개다.이 문제들을 ‘공공 영역은 민간처럼 경쟁하지 않으니까’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사소한 짜증부터 시간 낭비, 개인정보 유출, 때로는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사고까지, 공공 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민들이 일상에서 수시로 마주하는 공공 영역의 불편과 번거로움을,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정부와 공무원의 관점으로 설계된 공공 데이터가 어떻게 사회 전반에 불편을 초래하고 차별을 만드는지, 이 과정에서 어떻게 사각지대가 생겨나는지,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공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고 분석해야 하는지를 10가지 키워드를 통해 단계별로 보여준다. 알고리듬으로 대표되는 추천 시스템은 디지털 서비스의 기본이자 상식이다. 유튜브, 멜론, 넷플릭스, 쿠팡, 배달의민족까지 모든 플랫폼에서 사용자의 이용 패턴을 분석해 자동 추천 기능을 제공한다. 그런데 왜 정부 서비스는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을까? 내게 적합한 복지 서비스를 신청하려면 정부 홈페이지 곳곳을 열심히 찾아 헤매는 걸로도 모자라 인터넷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조언을 찾아봐야 한다. 만약 공공앱이 쿠팡이나 배민만큼 쉽고 빨라진다면, 내가 원하는 서비스를 간편결제처럼 한번에 신청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 일상은 얼마나 편리해질까? 저자는 사회과학자로서의 지식과 공공 분야 데이터 과학자로서 쌓아온 경험을 살려 이러한 질문에 충실히 답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아직은 생소한 ‘시빅 데이터’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국내 저자의 첫 저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IT 기술, 데이터, 행정 제도 등을 잘 몰라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진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시민들의 불편이 정부에겐 기회가 된다”10가지 키워드로 만나는시민을 위한 데이터, 시빅 데이터 사용법의 모든 것 이 책은 시빅 데이터를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10가지 키워드로 구성되었다. 먼저, 1~3장은 시빅 데이터를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한 배경지식을 다룬다. 1장 ‘기회’에서는 시빅 데이터가 어떤 역사적 배경을 통해 부상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특히 미국과 한국의 사례를 통해 공공 정책 영역에서 기술과 데이터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흐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소개한다. 2장 ‘데이터’는 데이터 중심의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누구나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하는 데이터 상식 세 가지를 다룬다. 3장 ‘권력’에서는 데이터와 정부 정책의 연결고리를 설명한다. 민주주의 사회, 복지국가에서 데이터는 정부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일종의 기름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더 많은 데이터가 더 나은 정책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왜곡된 데이터는 차별을 강화하는 정책을 만들고, 이 차별은 세대를 잇는 견고한 불평등을 만든다는 점을 살펴본다. 4장 ‘변화’에서는 시빅 데이터로 정부를 바꾸기 위한 기본 원리를 설명한다. 접근하기 쉬운 정부일수록 차별은 줄어들고, 기회는 늘린다. 이런 정부가 만드는 정책이라면 시민이 이해하고 따르기 쉽다. 정부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느끼는 정신적 피로도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다.5~7장은 이 책의 핵심을 담고 있다. 5장은 ‘인터페이스’를 주제로 공문서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정부와 시민이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접점이 바로 공문서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공문서를 쉽게 작성할 수 있을 때 정부 서비스를 보다 편리하게 쓸 수 있다. 6장 ‘인프라’는 정부가 수집하는 데이터가 정부가 만들 수 있는 정책의 틀을 결정한다는 점을 소개한다. 많은 데이터가 아닌 필요한 데이터를 잘 모을 때, 시민의 필요를 미리 파악하고 찾아가는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7장 ‘피드백’의 경우, 보이지 않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정부가 다양한 시민의 불편함에 관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모을 수 있어야 지속적으로 개선 가능한 정부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음을 주장한다.8장 ‘균형’은 공공 영역에서 개인정보를 포함한 민감한 데이터를 다루기 위해 주의할 사항을 정리한다. 공공 영역에서 필요한 것은 파괴적 혁신이 아닌 안전한 혁신인 만큼, 민간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데이터를 다룰 의무가 있다. 정부가 가진 개인정보에는 시민 개개인의 연봉, 건강 등 민감한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민감한 데이터일수록 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9장 ‘인재’는 공공 영역에서 데이터를 제대로 모으고 다루기 위해 어떤 인재를 모으고 어떻게 양성해야 할지 논의한다. 한 조직의 역량은 그 조직 구성원의 역량만큼 뛰어나다. 정부의 데이터 역량은 결국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데이터 역량에 달려 있다. 10장 ‘결론’은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필요한 일을 하는 정부, 잘해야 하는 일을 잘하는 정부가 탁월한 정부이자 시민이 원하는 정부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시간을 아껴주면 불평등이 줄어든다”식품 지원부터 투표 방식 변경, 인도(人道) 개선 프로젝트까지 시빅 데이터로 차별을 줄이고 기회를 늘리는 법 우리는 흔히 부자의 시간이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의 상대적 가치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 크다. 월급이 적으니 일을 많이 해야 하고, 고용 상태가 불안정하니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저자가 일하는 코드 포 아메리카에서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협력해 지역 주민들이 식품 지원을 더 쉽게 받을 수 있도록 만든 사례 중에 ‘겟캘프레시’가 있다. 주정부가 활용하는 복지 서비스 지원서에 질문할 필요가 없는 질문은 삭제하고,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은 지원자가 가장 이해하기 쉽고, 실수하기 적은 방식으로 질문함으로써 무려 6배에 가까운 시간 단축을 이뤄낸 것이다. (본문 12p, 180p)미국 콜로라도주는 2014년 시험적으로 전면 우편투표를 도입했다. 굳이 투표소까지 올 필요 없이 자신이 편한 시간에 편한 곳에서 투표를 하고 그 결과를 선거관리위원회에 우편으로 보낼 수 있게 한 정책이다. 스탠퍼드대, 워싱턴대, UC버클리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정책 도입으로 투표율이 8퍼센트 증가했다. 표수로는 90만 표에 가깝다. 정해진 날짜에 투표 장소까지 가야 하는 불편함이 사라지자 기존에 투표소를 찾기 힘들었던 청년, 노동자, 저학력자, 유색인종 집단에서 투표율이 더 높아졌다. 조지타운대 파멜라 허드와 도널드 모이나한 교수의 ‘행정부담 이론’에 따르면, 콜로라도주의 우편투표 정책 도입은 행정부담 중 ‘준수비용’을 줄여준 결과라 할 수 있다. (본문 147~148p)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워싱턴대 메이커빌러티 랩(The Makability Lab)은 접근성, 지속성, 교육에 관한 상호작용 기술을 개발한다. 이곳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중에는 중 기존의 인도(人道)를 장애인도 걷기 편한 길로 만든 ‘프로젝트 사이드워크’가 있다. 연구팀은 구글이 16년 전부터 수집한 방대한 거리 데이터인 ‘구글 스트리트 뷰’를 통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실제 인도에서 휠체어를 사용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구분 기준을 만들고, 그 패턴을 인공지능에게 훈련시킨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애인에게 친화적인 인도와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한 결과, 시애틀 도심의 경우 무려 2,000킬로미터가 넘는 도로를 상세하게 조사할 수 있었다. (본문 260~261p) 이처럼 데이터는 시민을 통제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포용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시민들이 겪는 문제는 그들의 목소리가 데이터가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기업이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더 나은 상품을 만들 수 없듯, 정부가 시민의 목소리를 새겨 듣지 않으면 더 나은 정책을 만들 수 없다. 드러나지 않는 시민의 고통을 찾아주는 데이터가 더 나은 정책을 만드는 데이터다.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정부가 데이터 과학을 잘 활용하려면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똑똑한 인공지능으로 대단한 공공 서비스를 만들어도 시민이 쓰기에 불편하면 무용지물이다. 물론 정부 서비스를 잘 만든다고 가난이나 불평등 같은 거시적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공공 서비스가 쉬워지면 더 많은 시민이 정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 외에도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에는 저자가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다양한 사례와 근거가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여러 국제기구와 각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 자료, 주요 매체에 실린 논문을 충실히 인용해 신뢰도와 정확성을 높인 점 또한 돋보인다. 양적, 질적으로 만족스러운 시빅 데이터 관련 자료를 찾기 힘든 현실에서, 이 책은 공공 분야 종사자들과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보고(寶庫)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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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한국현대사 인권기행 (커버이미지)
    [사회]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한국현대사 인권기행
    • 박래군 (지은이)
    • 2021-03-03

    대한민국의 현대사는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저항의 역사다이 책은 30여 년간 활동해온 인권운동가가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현장들을 직접 찾아 인권의 시각으로 정리해낸 답사기이다. 제주 4·3, 광주 5·18, 세월호 참사의 절절한 현장부터 서대문형무소, 남산과 남영동 고문실 속 고초의 시간을 지나, 소록도와 마석 모란공원에 남겨진 치열한 삶의 흔적까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인권의 실태를 기록했다.인권의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들에게 저지른 폭력과 범죄의 흔적이다. 가해자가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기에 폭력과 범죄는 대규모였고, 더 집요하고 잔인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들딸, 부모형제의 죽음을 끌어안고 울음을 삼켜야 했던 사람들이 힘겹게 목소리를 내고 몸부림을 쳐왔기 때문에 인권의 현실은 조금씩 개선되어왔다. 이 책에는 그런 과정과 결과를 인권의 렌즈로 보고 담았다.저자인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1988년 광주 학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하여 세상을 떠난 동생 박래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하다가 인권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현대사에서 인권의 문제가 드러나는 순간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러한 활동의 연장으로 이 책의 인세는 인권재단 사람의 기금으로 쓰인다.인권의 현장들을 직접 둘러보는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된 이 책은 동학혁명 유적지, 남북 분단 현장, 민간인 학살 터, 종교 순교지 등을 둘러보고 2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오롯이 인권의 시선으로 본 전국 9곳의 역사적 현장들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인권 실태 기록이 책은 저자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갖고 있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떠난 인권 현장 답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여행 정보가 가득한 다른 일반적인 여행기와는 달리 역사적인 사건이나 현장을 인권의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쓴 기록이다.그 시작은 학살과 해원의 섬, 제주도다.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해체된 지 한참 지난 오늘까지도 걸핏하면 ‘빨갱이’니 ‘좌익’이니 ‘종북’이니 하는 이념의 틀 안에 갇혀 있는 답답한 인권의 현실은 제주 4·3에서 비롯되었고, 대한민국 인권의 역사도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제주 4·3 현장을 인권기행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다.전후세대의 안보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만든 전쟁기념관에서는 전쟁을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 영웅을 추앙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기념’하는 전시가 인권의 측면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지적한다.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인 소록도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내부 지역까지 들어가 직접 취재한 생생한 이야기를 담았다. 소록도에서는 한센인에 대한 격리와 감금, 강제노동, 폭력 등 지금도 섬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장애인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 차별을 발견한다.광주 5·18 현장은 두 지역으로 나눠서 살펴본다. 먼저 광주천을 기준으로 북쪽 지역인, 전남도청과 금남로가 이어지는 구도심에는 항쟁의 흔적이 좀 더 선명하게 남았다. 이곳에서 국가폭력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음에도 진실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에 주목하며 책임자 처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다음으로 찾은 광주천 남쪽 지역에서는 농성광장, 상무대 영창, 들불야학 터, 양동시장, 오월어머니집 등 노동자와 서민 들이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5·18항쟁을 기록한 역사에는 여성이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보여줬던 헌신은 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밑바탕이 되었음에도 소극적으로 다뤄지거나 생략되었다. 이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봄으로써 이들이 항쟁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확인한다.남산 안기부 터와 남영동 대공분실은 독재국가가 고문이라는 공포를 활용해 폭력적으로 권력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지금도 남아 있는 그 흔적을 찾아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고문이 우리 일상의 공간과 그리 멀지 않음을, 그래서 다시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인권의 현장 을 보전하고 기억해야 함을 이야기한다.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일제강점기 감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되어 있는 현재의 전시를 둘러보면서, 이후 독재 정권을 지나기까지도 비참하고 열악했던 수감자의 처우는 생략한 채 일제에 대한 분노만 가득한 전시 방향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아울러 오늘날까지도 논란으로 남아 있는 사형제도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본다.마석 모란공원에서는 저자가 의미를 담아 만들어본 노동의 길, 민주의 길, 인권의 길을 각각 따라가보면서 민주열사묘역에 잠든 이들의 죽음을 돌아본다. 또 저자의 제안을 따라 묘비의 앞면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옆면과 뒷면, 주위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을 좀 더 깊이 떠올리며 생생한 한국현대사를 공부해볼 수 있다.세월호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저자가 4·16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가까이에서 경험한 현장을 바탕으로 꼭 필요한 이야기를 담았다. 목포신항의 세월호 선체, 팽목항과 침몰 현장, 안산과 인천, 그리고 광장까지, 세월호 참사의 현장을 둘러본다. 각각의 장소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게 흐르는 시간들이 아직도 가슴 아프게 남았다. 저마자 제자리로 돌아가 일상을 살고 있지만, 6년 동안 광장에서 함께 했던 연대의 기억은 계속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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