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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아들 (커버이미지)
단군의 아들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정찬주 지음 
  • 출판사작가정신 
  • 출판일20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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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홍암 나철 선생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화두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다”

이국 만리 만주 땅에서 우리 동포들은 어떻게 하나로 뭉칠 수 있었을까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어떻게 항일 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단군의 자손이라는 자주민족의 정통성을 어떻게 이어올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은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의 일대기이면서 일제강점기 동안 단군조선을 부정, 말살하는 식민사관에 의해 민간 전승 신화로 묻혀간 단군을 우리 역사 속으로 이끌어낸 역사교양소설입니다. 나철 선생과 선생이 살았던 한일합병 전후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단군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단군조선시대 또한 우리 역사에 어떠한 표상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나철 선생은 민족의 실존에 관한 뿌리, 민족혼의 바탕을 우리의 역사 시작인 단군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고려 때까지 이어져 오던 신교(神敎, 단군교)를 7백 년 만에 겨레의 얼을 담은 민족 종교로 중광(重光, 부활)했습니다. 이에 역사 주권을 지키는 것이 곧 자주민족의 길임을 깨달은 많은 애국지사들이 선생이 중광한 대종교에 동참하였습니다. 김교헌, 윤세복, 이회영, 서일, 김좌진, 박은식, 신채호, 주시경, 신규식, 정인보 선생 등 학자와 언론인, 독립투사들이 대종교 교도로서 국내에서는 우리글과 말을 지키고 만주에서는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습니다.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한국 민족의 역사이며 단군조선은 허구가 아니라 한국 민족의 역사 시작이라는 점에서 일제는 국내와 만주에서 30만 대종교 교도를 탄압하고 간부들을 처형했습니다. 나철 선생은 스러지는 민족정기와 교단을 지키기 위해 구국의 심정으로 순교하기에 이릅니다. 만주의 청산리 대첩은 선생의 죽음에 자극받은 서일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에 거둔 승리입니다. 대부분이 대종교 교도였습니다.

다가오는 10월 3일 개천절은 나철 선생이 단군의 개극 입도(나라를 열고 도를 세움)를 기리는 명절인 개천절을 경축일로 정하고 상해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정한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기에 항일 투사와 지식인들이 단군조선을 민족의 역사 시작으로 보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음입니다. 이는 홍암 나철 선생이 지금 우리 시대에 던지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독립운동의 대부, 단군 사상의 실천자 홍암 나철 선생 이야기가 담긴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단군의 아들』에 많은 관심과 협조 부탁드립니다.

민족혼과 단군 국조 사상

일본은 자국 학자들을 동원해 침략의 논거를 준비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는 1882년에 『조선사』라는 역사서를 내놓았다.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논거를 제공하는 허무맹랑한 역사서였다. 한국의 역사는 기자조선과 한사군 등 중국의 지배를 받아 시작되었고 단군 고조선의 역사는 신화 전설일 뿐이며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동족으로 한국의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일본이 지배했다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술한 역사서였다. 1883년에 발간된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도 정한론과 식민사관의 논리를 제공하는 역사서였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하고 10년 후 나인영(대종교 중광 후의 이름은 나철) 선생은 일본의 한일협약안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내 우호세력을 만나지만 한일의정서는 체결되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을사조약을 서두른다. 이때 선생은 단재 신채호를 알게 된다. 친일 매국노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재극 등의 을사 육적 주살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소갈증을 치료하던 중에 『단군교포명서』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단군은 우리 민족에게 누구이고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홀연히 깨우친다. 단군의 얼이 우리 민족의 혼백이고 우리 민족이 단군의 자손임을 깨달은 나인영 선생은 1909년 2월 5일 7백 년 만에 단군교를 중광하면서 비로소 나철로 개명한다. 나철 선생은 역사 주권과 국권 회복의 길을 아우르는 민족종교로서의 위상을 확립해나간다.

오늘날 조선이라 함은 단군조 중엽의 배달국을 한자로 바꾼 말이요, 배달목이라 함은 단군의 광휘목光輝木이란 말이요, 태백산이라 함은 단군산이라는 뜻이요 패강浿江이라 함은 단군의 강이란 말입니다.
임검任儉이라 함은 임금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신인神人이란 뜻이었습니다. 또 서울西鬱, 즉 국도란 말은 단군조 말에 천도한 부여국 가운데 한 지명이었습니다.
튼튼한 물건을 단단檀檀이라 하고 매우 위태한 것을 탈脫이라 한것도 모두 불교 유입 때 나온 말로 단단탈탈가檀檀脫脫歌가 그 한 예입니다. 또 의복에 있어 하얀 영금領襟을 다는 습속은 단군을 사랑한다는 태백산 표장標章이었고, 아이들이 머리에 맨 단계檀戒는 발해국에서 부모들이 단군에게 아이의 출생을 고하고 아이의 무병장수를 비는 글을 오색 헝겊에 싸서 아이의 머리에 매고 영계靈戒를 받던 풍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집안에 모신 성조신成造神 역시 단군이었던 것인데 모두 잊어버린 것이니 한심합니다. 매년 10월 집집마다 단군을 모실 때 단군상을 걸었는데 그 그림은 신라의 명공 솔거가 그렸다고 고려시대의 평장사 이규보가 우리에게 전한 바 있습니다. 이규보는 ‘고개 너머 집집마다 신조상의 절반은 모두 당대 명공이 그린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마을마다 있는 선령당仙靈堂의 선령은 단군의 명을 받아 산을 뚫고 강을 막던 팽오彭吳 그분이었던 것입니다. 농부들이 들에 나가서 점심을 먹을 때 먼저 밥 한 숟갈을 땅에 버리면서 고수레라고 소리치는 것도 단군의 명을 받아 일하던 고시高矢에 대한 제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지금 만주 철령 등지에 왕왕 수풀 속에 고묘古廟 유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태고족의 단신제壇神祭 유허라고 합니다. 단壇은 단檀의 잘못인데 이것은 고구려 때 단군교가 가장 성할 때 단군을 숭배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또 임진왜란 때 일본 사무라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우리나라 도공 18개 성씨 가족을 납치하여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 정착시켰는데 그 18개 성씨들이 본국에서의 고습을 그대로 따라 하기를 단군 성신을 봉숭하여 집집마다 제사 드렸다고 합니다.
-274~276쪽

개천절 창시

1910년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속국이 된 치욕의 해. 단군교가 중광되고 1년 반만에 신도수가 2748명으로 늘어나자 나철 선생은 일제의 탄압이 닥칠 것을 짐작하고 교명을 대종교로 개명한다. 대종교에는 선생의 스승이자 후원자인 김윤식, 박은식, 신채호, 신규식, 주시경, 김두봉과 같은 독립운동 1세대들이 포진하고 있어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대종교 의식으로 7가지 조례를 정함에 음력 10월 3일 단군 성조의 개극 입도를 기리는 경절을 개천절로 선언하고 경축일로 정해 해마다 경축 행사를 연다. 상해임시정부는 개천절을 광복의 뿌리로 삼아 국경일로 정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개천절은 현재 대한민국이 국경일로 기리는 10월 3일 개천절이다.
대종교의 의식 규례는 단군을 천조라 칭하고 있어 일본 천황의 조상인 황조보다 위에 두었으며 개천절을 명명하여 조선 민족의 역사 시작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쓴 규장각 부제학 김교헌이 대종교에 입교함으로써 단군 국조 사상에 역사적 위상을 더한다. 나철 선생은 김교헌과 윤세복을 데리고 단군이 천제를 지낸 마니산 참성단에 올라 천제를 지낸 뒤 총본사를 조선의 고토인 만주로 옮기니 신채호 등의 국학자와 주시경 등의 한글학자, 김좌진 등의 독립투사들과 이상룡, 신규식 등의 상해임시정부 위원들이 대종교 교도로서 항일 투쟁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 북간도에는 가난과 일제의 수탈을 피해 이주한 동포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며 살고 있었고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홍범도 등 독립투사들이 항일투쟁을 하고 있었다.

“대종사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네까?”
주시경이 나철에게 물었다. 나철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대종교 신자라면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 의식 규례가 있어야 헐 것 같아부러서 초안을 맹글었네. 한번 읽어볼랑가?”
나철은 자신이 작성한 7가지 조항으로 된 대종교 의식 규례초안을 보여주었다. 그 일곱 가지 중에서 나철이 큰 의미를 둔 것은 3조항과 7조항이었다.

3. 개천절(원명 ; 개극절)은 강세일降世日과 개국일開國日이 같은 10월 3일이라 이를 합칭한다.
7. 천조天祖는 삼신일체이니 환인과 환웅과 환검이라 함은 천조단군 일위의 신을 분칭한 것이다.

3조항은 환웅이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를 연 강세일과 환웅의 아들 단군이 단군조선을 건국한 개국일이 10월 3일로 같은 날이니 둘의 이름을 합쳐서 개천절로 부르겠다는 나철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7조항은 환인과 환웅, 환검(단군)은 각각 삼신이지만 또 하나의 일체로서 단군이 되기도 한다는 삼신일체 사상을 나철이 강조하고 있음이었다. 나철은 단군을 천조라고 처음으로 칭하고 있기도 했다.
교당에 모인 모두가 나철이 왜 개천절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의식 규례에 포함시켰는지를 이해했다. 개천절이 있는 한 나라를 빼앗겼을망정 사람들이 조선 민족 역사의 시작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기호가 말했다.
“대종사 성님, 그런께 개천절은 우리 민족 역사의 근원을 잊지 말자는 날이 되겄그만요.”
“우리덜이 개천절의 뜻만 잊지 않아도 일제 침략은 결코 성공허지 못할 것이네.”
“대종사님께서 명명한 개천절이야말로 광복운동의 뿌리이고 샘이라는 생각이 듭네다.”
주시경은 나철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자신이 펼치고 있는 한글운동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 대종교의 시교였다. 한글 운동이 조선의 말을 지키는 것이라면 대종교의 단군 선양은 조선의 역사를 지키는 신앙이었다.
-332~324쪽

나철 선생의 순교와 청산리대첩

중국은 간도의 동포들이 개간한 농토를 몰수하고 30만 교도의 대종교를 압박한다. 이주민들과 망명 인사들이 상해와 북경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나철 선생은 형식상 총본사와 간도 교구를 해산한다. 그리고 교구를 김교헌과 윤세복, 서일 등에 맡기고 항일투쟁의 의지가 식어가는 서울로 돌아온다. 지리멸렬한 항일투쟁과 교단의 존속을 위해 나철 선생은 “나의 조천(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광복의 불씨가 되길 바란다”며 구국의 심정으로 순교를 결심한다. 장소는 구월산 삼성사. 3일간 단식 수도 끝에 폐기절식으로 조천하니 이에 자극받아 대부분 대종교 교도인 서일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청산리 백운평 골짜기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둔다. 신규식은 나철 선생을 보내는 만장에 ‘조선조 5백 년간 둘도 없는 선비요, 대종교 4천 년 이후 제일의 종사다’라고 하였고 2대 대종사 김교헌의 제자인 최남선은 선생의 조천을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친 육신제’라고 표현했다.

“조천朝天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이지라우.”
“그라제. 사람은 누구나 하늘로 돌아간다. 다만 어찌케 가느
냐가 다를 뿐이여.”
“으째서 고런 말씸을 허십니까요?”
“꺼져가는 모닥불에 불을 살릴라고 헌다. 나의 조천이 사람
덜에게 두고두고 광복의 불씨가 돼분다믄 을매나 좋겄냐?”
“대종사님, 오직 고런 방편밖에 ㅤㅇㅡㅄ습니까요?”
“니는 누구헌티도 내 조천을 말해서는 안 된다.”
“조천허시는 날을 벌써 택일했습니까요?”
“아니다. 단군 천조님의 덕음을 아직 듣지 못했다.”
나철은 다시 한 번 더 당부했다.
“발설해서는 안 된다. 명심허그라.”
“예, 대종사님.”
“내가 갈 디는 고향 선산이 아니니 그리 알그라.”
“그라믄 으디로 가신단 말씸입니까요?”
“환웅님께서 하늘을 연 백두산이 보이는 디로 옮겨 묻그라.”
-390쪽

유언에 따라 관은 만들지 않았다. 유해는 송판 위에 뉘어졌고 부들자리로 덮었다. 그리고 발인제는 삼성사 마당에서 8월
21일 오전 10시에 행했다. 유해는 교도들이 운구했다. 안악면으로 갔다가 다시 칠십 리 길을 운구하여 사리원역에 도착했다. 서울 남대문역에서 하차해서는 남도 교구 교당까지 상여를 이용하지 않고 지게로 검소하게 유해를 옮겼다. 더운 날이 경과함에 따라 유해는 박달나무 관에 안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8월 26일부터 일주일 동안은 교도들의 조문을 받았다. 9월 1일에 나철이 대종사 신형으로 추승을 받자, 유해는 이때부터
신해神骸로 불렸다. 이후 신해는 장남 정련 책임 하에 전리 강석화, 김서종과 함께 화룡현 청파호를 향해 운구했다. 10월 6일 청파호에 도착한 신해는 11월 20일 장례식까지 거의 한 달 보름 동안 청파호 교당 수도실에서 문상객을 맞았다. 조문 기간 동안 만주의 모든 조선인들은 청파호 교당으로 모여들었고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단군의 자손들이었다.
신해가 화장터로 가는 동안 만장이 나부꼈다. 신규식은 두 장의 추도 만장을 통해 ‘조선조 5백 년간 둘도 없는 선비요, 대종교 4천 년 이후 제일의 종사다.’ ‘우리 민족의 기상 쇠하지 않았으니 그 뜻을 이을 자 끊이지 않으리.’라고 기렸다. 대종교 2대 교주가 된 김교헌의 제자인 최남선은 나철의 순교는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친 육신제肉身祭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나철의 순교로 인해 지리멸렬하던 민족 전선이 비로소 통일된 정신적 지주, 또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414~415쪽

저자소개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글쓰기로 오랜 기간 소설과 명상적 산문을 발표해왔다. 법정 스님은 저자를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현재 전남 화순 계당산 산자락 이불재耳佛齋에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장편소설 『단군의 아들』, 『천강에 비친 달』, 『인연 1, 2』,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다산의 사랑』, 『소설 무소유』, 『산은 산 물은 물』, 『가야산 정진불 1, 2』, 『다불』, 『만행』, 『대백제왕』,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산문집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부처님 8대 인연 이야기』, 『암자로 가는 길』,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나를 찾는 붓다 기행』, 『정찬주의 다인기행』, 『뜰 앞의 잣나무』, 『불국기행』, 그리고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 『마음을 담는 그릇』, 『바보 동자』 등이 있다. 1996년 행원문학상, 2010년 동국문학상, 2011년 화쟁문화대상을 수상했다.

목차

귀국 1
귀국 2
익문사
밀사
을사조약 1
을사조약 2
금곡 마을
경월암
박유전
스승 1
스승 2
보자기
닭장떡국
일지당
두 손님
행방불명
참간장
폭약 궤짝
주살 작전
유배형
사면
의형제
단군교포명서
환속
중광
나철의 시간
망 단군 망 역사
개천절
귀인
마니산 천제
북간도행
30만 교도
기도
단식 수도
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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