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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의 자리 (커버이미지)
누의 자리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이주혜 지음 
  • 출판사자음과모음 
  • 출판일202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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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작가-작품-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다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18

“내 자리는 어딘가요?”
세상의 모든 자리 없는 이들을 위한 애도의 이야기

“오늘 그 기다림은 끝났다.
내가 너를 이 자리에 데려다 놓을 테니“


표제작이자 첫 번째 소설인 「누의 자리」는 너의 죽음 이후에서 시작한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난 곳은 학원의 신입 강사 환영식. “내 자리는 어딘가요?”하고 묻던 너에게 내가 건넨 일말의 호의는 너에게는 유일한 ‘환대’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던 듯 너는 나를 좇기 시작한다. 오래전 사라진 단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념인 ‘누’에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은 너의 죽음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네가 생전 자신의 수의를 만들기 위해 ‘제비 뜨개방’에 오갔다는 것으로 네가 스스로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 소설에서 네가 왜 죽었는지, 혹은 왜 죽음을 택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너는 죽었고, 나는 너의 가족이 택한 “짐승의 아가리 같”은 바다 대신 네가 좋아하던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너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뼛가루 한 줌” 대신 네가 남긴 누의 일기장과 수의를 태운 재를 말이다.

구멍은 좁고 길어야 한다. 제법 깊이 박힌 원통 속 흙을 모두 파내고 거기에 질척거리는 너의 재를 부었다. 이제 파낸 흙을 다시 채우고 흔적을 지울 차례다. 수백 년 동안 왕을 기다렸던 빈자리 한 귀퉁이가 이제 너의 자리가 될 것이다. 너는 이곳에서 왕을 따돌리고 느긋해진 한 여자와 나란히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휴식할 것이다. 나는 사계절 내내 이곳을 찾아와 너와 함께 산책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이곳은 누의 자리로 완성될 것이다.
(「누의 자리」, 31~32쪽)

간절한 부름에 대한 응답
너를 읽고 나를 쓰는 이야기


「누의 자리」가 사랑을 잃은 후 애도의 이야기라면 「소금의 맛」은 끝내 지켜낸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너와 나는 신의 이끌림으로 처음 만났다. 너의 나라로 여행을 간 나는 그 나라에서 신으로 취급된다는 어린 사슴을 따라 걷다 우연히 너를 마주한다. 신의 안배로 시작한 사랑이어서일까. 너와 나의 사랑이 뜨거웠던 때는 오직 신들의 도시 하코다테에서뿐이었다. 하코다테에서 너와 나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하늘길이 끊긴 후 너와 나는 만남도, 사랑도 멈춰버렸다. “우리의 사랑이 오직 그 도시에서만 가능했다는 사실이 균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너는 나에게 메일 한 통을 보낸다. 온통 너의 말로 쓰인 메일에 나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번역기를 통해 알아낸 메일의 내용은 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소설의 도입부 일부. 나는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글을 뜯어 살피다 기묘한 번역 릴레이를 시작한다.

너의 번역은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알 길이 없어 나는 절망했다. 교실 너머로 벌써 해가 지는 게 보였다. 하늘의 뺨이 붉어지고 있었다. 노을에 대고 너의 이름을 몇 번 불렀다. 잠시 후 나는 노트북에 창을 두 개 분할해서 띄웠다. 하나는 영어 원서 전자책, 또 하나는 한글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날 교문이 굳게 닫히는 것도 모르고 늦도록 『소금의 값』 원서를 내 식으로 번역했다.
(「소금의 맛」, 65쪽)

안식의 공간,
그리고 남겨진 이의 후회와 사랑의 자리


마지막 소설 「골목의 근태」는 「누의 자리」의 거울상 같은 소설이다. 두 소설은 제비 뜨개방이라는 공통의 공간을 기준으로 서로 대칭된다. 「누의 자리」의 너와 「골목의 근태」의 나는 ‘엄마 노릇’을 강요받다 허물뿐인 죄목으로 이혼(당)하며 각 가정에서 퇴출당한다. 이후 둘은 제비 뜨개방에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누의 자리」의 너, 희원이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과 달리 「골목의 근태」의 나는 제비 뜨개방이라는 장소를 경유함으로써 삶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누구도 내가 아이를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내가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과도한 벌을 받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를 낳고 키워준 친정 엄마마저도 이혼 직후 친정에 와 누워 있는 내게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미가 되어서는 왜 그렇게 일 욕심을 부렸어.
(「골목의 근태」, 95~96쪽)

이주혜의 세 소설의 나와 너는 모두 여성이다. 아이를 잃고, 가정을 빼앗기고, 강요받고, 부당 앞에서도 아무 말할 수 없는 여자들. 그럼에도 사랑하고자 하는 여자들. 이들 여자들은 기존의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거나 부정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누의 자리』는 빼앗긴 자리를 되찾으려는 투쟁의 시도가 아니다. 너와 나라는 둘만의 기록을 적어내리던 공책, 서로 다른 언어가 뒤섞인 둘만의 번역서, “왔어요?” 하고 앉아 있던 난로 옆자리를 내어주는 호의 같은 것. 『누의 자리』는 세상의 잣대에서 외면받은 이들을 향한 이주혜의 다정한 부름이며 따뜻한 연대의 이야기다.

저자소개

읽고 쓰고 옮긴다.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자두》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누의 자리》, 산문집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옮긴 책으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멀리 오래 보기》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양귀비 전쟁》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소설 누의 자리

소금의 맛

골목의 근태



에세이 누군가 향을 피웠다, 아니 불부터 붙였던가?



해설 자리 없는 여자들 ― 소영현

한줄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