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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 - 조영남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 (커버이미지)
예스터데이 - 조영남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조영남 지음 
  • 출판사문학세계사 
  • 출판일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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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만능 엔터테이너의 버라이어티한 라이프 스토리

조영남은 현역 가수다. 한 번도 가수 아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수’라는 신분적 조건은 그의 버라이어티한 삶을 설명하기에 어딘지 충분치 않다. 실제로 그는 뮤지션이면서 TV와 라디오의 방송 진행을 했고, 그림을 그려서 개인전을 열었고, 많은 책을 펴냈다. 만능 엔터테이너의 기원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조영남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된 것은 특유의 자유분방한 삶의 스타일에서 야기된 몇몇 사회적 스캔들 및 해프닝이었다. 그때마다 좋든 싫든 극적인 모티프와 에피소드들이 그의 삶에 축적되었다. 그는 늘 화제와 풍문의 생산자였던 것.

낭중지추라고, 타고난 재능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음대에서 정통 성악을 공부하던 대학생 신분으로 무교동 음악다방 ‘쎄시봉’ 무대에서 가공할 만한 가창력을 선보인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청춘 세대의 주연이자 상징으로 각광받았던 조영남은 어느 사이 칠순 중반의 고개를 넘겼다. 그에게는 평생 열광적인 호의와 지지, 오해와 억측이 동시에 따라붙었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떤 시선으로 자신의 물리적 생애에 대한 자평과 성찰을 하고 있을까. 이 책은 그에 대한 성실한 답변에 해당한다.

‘조영남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는 조영남이 80을 바라보면서 진솔하면서도 담대하게 털어놓는 자전적 회고록으로 2021년 3월부터 12월까지 장장 10개월 동안 43회차에 걸쳐 <중앙SUNDAY>에 연재된 원고를 묶은 것이다. 원고가 연재되는 동안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솔직한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영남이 쏟아낸 거침 없는 이야기에 독자들은 댓글을 통해 질타와 야유를 하기도 했고, 격려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텍스트는 한 인간의 삶이 이뤄낼 수 있는 최대치의 성취와 시련, 극복과 좌절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거기에 보기 드문 인사이트와 성찰이 따라붙는다. 이토록 버라이어티한 모티프와 에피소드를 가진 삶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책에서 다뤄지는 서사의 볼륨은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텍스트는 조영남이 겪고 치러낸 동시대인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저자가 사랑하고 이해한 동료 및 지인들과의 서사를 거침없는 구어적 문투의 형식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애초부터 가식이나 자기 미화의 혐의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조영남에 대해 ‘개인주의자’, ‘탐미주의자’ 또는 ‘독고다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이 관계를 맺었던 이들에 대한 조영남의 섬세한 이해와 사랑과 외경을 읽으면서 선입견이나 편견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일종의 ‘프렌즈십(우정주의, 친선주의)’이라고 할 만하다. 이 프렌즈십은 주로 이해를 받고 해석을 당하는 데 익숙한 예술가들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라디오 진행자 최유라와 피디인 김명정 씨 아이디어에 의해 다시금 쎄시봉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 공연이 기획되었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조율사는 조영남이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매사가 귀찮고 누가 하자면 마지못해서 하는 캐릭터인 듯하지만, 누군가는 꼭 맡아야 할 역할이 있을 때 조영남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해내곤 한다. 이와 같은 희생적인 프렌즈십의 태도는 예술가에겐 매우 귀한 것인데, 조영남에게 이런 품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일반 독자는 드물다.

“나를 키워준 충청도 그리고 내가 활짝 피어난 쎄시봉”

책은 유년 시절의 회고로부터 시작한다. 조영남의 인기곡 <내 고향 충청도>는 “일사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라고 시작하는데, 그 사연이 구체적으로 진술된다. 황해도 남천이 고향이었던 조영남 일가는 1951년 1월 4일에 피난민으로 합류해 한강 이남인 충남 예산 삽교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예회에서 <토스카>의 주제곡으로 알려진 <별은 빛나건만(E luce van le stelle)>을 불러 음악적 재능의 싹을 보여준 일화부터, 천방지축 개구쟁이로서 고향 마을에서 아버지와 친구들과 피워낸 재미있고 따뜻했던 일화들을 들려준다.

이어 청춘과 함께 시작된 쎄시봉(C'est Si Bon) 시절의 이야기가 일종의 하이라이트 필름처럼 펼쳐진다. 조영남은, 고교 성악 콩쿠르에서도 1등을 했고, 서울대 음대 재학생 오디션의 결과로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의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던 성악도였는데, 이후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쎄시봉을 처음 가게 된 까닭을, 아버지가 다방을 하던 음대 친구와 팝 음악에 심취했었기 때문일 거로 추정한다. 쎄시봉에서 모종의 음악 이벤트가 있던 어느 날, 객석에 앉아 있던 조영남이 당시 인기가수 차중락의 대타로 우연히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치면서 노랠 불렀는데, 그게 그만 객석을 들었다 놨다는 것이다.

이후 조영남은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 등 지금 우리가 다 아는 쎄시봉 멤버들과 교유하면서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뽐내게 된다. 당시 조영남의 재능을 알아보고 끌어준 은인과도 같은 존재들인 이백천과 조용호 피디, 훗날 부부의 연을 맺는 윤여정 등과의 인연도 같은 챕터에서 소개된다.

이후 조영남은 미8군 무대에 진출하고 <딜라일라>로 일약 스타가 되어 본격적인 뮤지션으로서의 활동기를 갖게 되는데, 그 시기의 회고담 속에서 진술되는 내용들은 한 편의 웨스턴 무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버라이어티하면서도 재미있고 극적이다. 이를테면,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광화문 시민회관의 공연장에서 <신고산타령>의 가사를 바꿔, 당시 붕괴된 와우아파트 사건을 풍자하며 “와우아파트 무너지느은 소오리에에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아아 어랑어랑 어허야.”라고 부른 것이 화근이 되어 당국에 의해 강제 입영된 사건, 군 재직 중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노랠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또 난데없이 예정된 레퍼토리에도 없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타령>을 불러 당시 장기 집권하고 있는 박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헌병대에 압송돼 조사를 받게 된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사연 등을 들려준다. 조영남이 술회하는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간 청와대 오찬에서 발언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기서 “제발 백담사 같은 델 가시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당시로는 발칙한 발언을 해 현장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는 회고도 자신의 지나치게 솔직하면서도 나이브한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구설과 다사다난의 아이콘-친일 선언 그리고 미술 대작 사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답게 조영남은 이어 사회적 공론장에서 공적으로 몰렸던 일들에 대한 소회도 구체적으로 털어놓는다.
2005년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 선언』을 펴내고 일본의 유력매체 《산케이신문》과 벌인 인터뷰에서 행한 국민 정서에 반하는 부적절(?)한 발언으로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혀 자의 반 타의 반 2년 넘게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던 소이연도 상세하게 회고된다. 그 일로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서강대 장영희 교수로부터 위로의 편지와 선물을 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장영희 교수, 화가 김점선, 행복 전도사 최윤희 등과의 교유로 이어진 사연도 소개한다. 이들은 조영남이 그리워하는, 이제는 모두 하늘나라에 가 있는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들이다.

또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현대미술 개념에 대한 고정관념을 한 번씩은 숙고하게 만들었던 2016년의 ‘미술 대작 사건’에 대한 소회도 밝힌다. 그는 당시 작품 환불을 원하는 모든 고객에게 환불을 해 주겠노라고 공언하는 바람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음을 고백하면서도 대법원 무죄 판결로 결론이 된 재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도 한다.
“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이겠지만, ‘조영남의 미술 대작’ 사건은 실로 세계적인 판결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대작 사건’이 재판정에 올라왔을 때도 변호사나 검사나 판사도 내 사건 사안에 대한 판례를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재판은 현대 미술 약 150년 만에 최초로 생긴 재판이었던 거다. 그래서 대법원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 조영남 재판을 대법원 공판정 안에서 소위 공개 공청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성사된 것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판결을 예상해서 명명백백하게 판결하겠다는 의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짝퉁 아티스트로 살아왔다.
적어도 윤여정 앞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감동을 안겨주는 스위트한 고백은 작년 4월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배우로 부상한 전처 윤여정에 대한 범상찮은, 겸허한 심사를 밝히는 부분일 것이다. 조영남은 별도의 독립된 이야기를 윤여정에게 할애하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배우 윤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이 시점에서 하려고 한다. 앞에서 몇 번 윤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흘렸지만, 내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는, 그리고 내 전 생애를 돌아보는 이 책에서 윤여정을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직무 유기이고 위선인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더는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영남은 자신의 실책과 부정으로 결혼 생활이 파탄 났음을 재차 인정하면서 결혼 생활을 할 당시 윤여정의 헌신에 대해 고마움을 피력한다.
“윤여정은 아이도 잘 키우고 살림도 썩 잘했다. 그땐 플로리다에 한인 식품점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밥상에 두부 지짐이 푸짐하게 올라왔다. 윤여정이 콩을 심어 두부를 만든 것임이 틀림없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음식을 탁월하게 잘 해냈다. 그뿐 아니라 어느 날은 나의 와이셔츠를 재봉틀로 직접 만들어 줬고 양복저고리도 만들어 줬는데 와이셔츠는 레코드 재킷에 사진으로 남아 있지만, 저고리는 간직하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만약 내조 아카데미상이라도 있었더라면 당연히 ‘월드 베스트 내조상’을 받아야 할 만큼 윤여정은 실로 내조의 여왕이었다.”

아울러 아카데미상 수상을 통해 배우로서 크나큰 성취를 이룬 윤여정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보내면서 “어떤 일을 목숨을 걸고, 살기 위해서 한다는 것, 이 얼마나 프로다운 태도인가. 나는 평생 뭘 할 때 목숨을 걸고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 짝퉁 아티스트로 살아왔다. 적어도 윤여정 앞에서는 말이다.”라고 솔직하면서도 겸허한 찬사를 보내고는 “나의 축하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윤여정은 13년 동안 법적으로 나의 부인이었고,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내 쪽의 부정에 의해 헤어졌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이 없을 수 없지만, 윤여정의 놀라운 성취를 내가 인정하고 축하하는 마음을 윤여정이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풍요롭고 진솔한 술회와 회고가 가득한 ‘조영남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는 결국 사람들과 함께해온 시간, 수많은 인연들과 엮이고 풀어진 이야기들, 그 과정에서 농축된 희로애락의 감정과 상한 마음들을 씻는 숭고한, 그러면서 조영남식의 위트가 넘치는 전무후무한 서사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회고록, 자서전의 새로운 스타일, 팝아트라고나 할까.

저자소개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남. 1951년 1 · 4후퇴 때 충남 예산군, 흔히 ‘삽다리’로 알려진 삽교면으로 영구 이주.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 한양대 음대에 진학했으나 자퇴하고, 다시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 1968년 미8군 부대 주한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다 1969년 「딜라일라」라는 번안가요를 불러 대중음악계 스타로 등극. 이 와중에 학교 중퇴(훗날 명예 졸업장을 받아 가까스로 졸업). 1970년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란 풍자가요를 부른 다음 날 곧장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 1973년 군 복무 중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흥 집회에서 성가를 부른 것이 인연이 되어 제대 후 미국 유학길에 오름. 유학 가기 전 서울 안국동 소재 ‘한국 화랑’에서 첫 미술 전시회를 열기도 함.
1979년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학학사(B. A) 학위 취득.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 복귀. 1990년 카네기홀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기도 함. 한편으로 1992년 「자니윤쇼」와 「열린음악회」 등을 통해 TV 매체에 등장. 이후 「조영남쇼」 「투맨쇼」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만난 사람」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등을 진행하는 등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방송 활동을 이어옴.
가수로서 발표한 주요 앨범으로는 『제비』 『딜라일라』 『보리밭』 『지금』 『화개장터』 『모란 동백』 『불 꺼진 창』 등이 있음.
화가로서는 1973년 ‘한국 화랑’ 전시 이후 서울 · 부산 · 베이징 · 뉴욕 · LA 등 세계 각지에서 약 40회 남짓 전시회를 열며 스스로 화수(畵手)라 칭해옴.
그는 펴낸 책으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어느 날 사랑이』를 비롯해 『보컬그룹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 『조영남 양심학』 『놀멘놀멘』 『예수의 샅바를 잡다』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천하제일 잡놈 조영남의 수다』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 등이 있음.

목차

005 프롤로그 스쳐 지나간 시간들을 붙잡으며



1부 황해도 남천, 충청도 삽교, 그리고 쎄시봉

016 두 개의 고향, 두 개의 생년월일

026 천방지축 어린 시절

035 별은 빛나건만, 내 음악의 뿌리

045 그리운 풋사랑

056 ‘쎄시봉’과의 첫 인연

066 ‘쎄시봉’의 스타가 되다

075 ‘쎄시봉’에서 시작된 인연들

086 ‘쎄시봉’에는 시인들이 산다

094 ‘알바’하다가 미8군까지

103 사랑 때문에 대학을 그만두고

113 다시 모인 ‘쎄시봉’ 친구들



2부 사람은 숲이고 바다다

126 성직자들과의 인연과 사연

136 두 걸물, 김민기와 이제하

146 하늘나라로 간 ‘여사친’들

155 청바지 문화의 기수 소설가 최인호

165 그리스·로마 신화의 대가를 아우로 두다

175 마광수, 너무나도 정직했던 남자

185 입방정 탓에 군에 입대하고

195 군대 생활과 장성들의 파티

205 군 감옥 갈 뻔한 사연

214 보고 싶은 사람, 보지 못한 사람

223 방 벽화 속 인물 소개



3부 세월은 흘러서 어디로 가는지

234 육상 경기에 빠지다

243 단편소설 ‘담박질’

252 이멜다와 구보타

261 백색 옷차림을 한 ‘문화인’

269 싸움을 걸었던 두 사람

278 필살기를 감춘 방송계 선배

286 넘볼 수 없는 선배 가수

296 소박한 전설의 여가수

306 말이 필요 없는 조용필과 나훈아

316 요절한 후배 가수들



4부 인생은 삼팔광땡이로소이다

326 1991년 청와대 오찬

335 고맙고 고마운 여친들

343 그 사람, 윤여정

351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359 조금은 건방진 얘기

368 졸지에 친일파로 내몰리다

377 이동원 추모 음악회

387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

398 가수 50주년 음반 신곡

408 믿기지 않는 신학대 졸업

416 에필로그 축복과도 같았던 내 삶의 백신들

한줄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