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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커버이미지)
오이디푸스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볼테르 (지은이), 전종호 (옮긴이) 
  • 출판사지만지드라마 
  • 출판일2020-04-20 
보유 1, 대출 0, 예약 0, 누적대출 0, 누적예약 0

책소개

볼테르가 다시 쓴 <오이디푸스>, 고전의 가장 현대적인 각색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전범으로 꼽으며 사건이 개연성과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점을 특히 높게 평가했다. 누가 여기에 반론을 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볼테르가 보기에 이 고전은 투박하기만 했다. 전막에 걸쳐 거의 모든 장면에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이자 그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게 명백히 암시되고 있음에도 정작 당사자들은 그런 사실을 의심조차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르네유, 드 라 모트 등 당시 내로라하던 고전극 작가들의 리메이크작들도 이런 오류를 답습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볼테르는 “그리스 시인들은 아무리 찬양해도 무방하지만,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리고 새로운 구상으로 <오이디푸스>를 다시 썼다. 주제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오직 “신과 인간의 대립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초점을 맞춰 줄거리를 짰다. 테베 통치권에 관한 얘기도,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사랑 얘기도 걷어 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사건의 ‘개연성과 필연성’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상식적이고 논리적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모든 사건이 그럴듯하게 전개되도록 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볼테르의 이런 시도는 관객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24세 청년 볼테르의 데뷔작은 고전 비극의 거장이었던 코르네유의 <오이디푸스>를 밀어 내고 프랑스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가 되었다.

잔인한 신과 결백한 인간의 이야기
볼테르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각색하면서 특히 주목한 대목은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가 각자 비밀로 간직해 온 신탁을 털어놓는 고백 장면이었다. 코르네유의 각색본에선 과감히 생략되었고, 볼테르의 지인들 역시 삭제하길 당부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볼테르에겐 이 대목이 가장 중요했다. <오이디푸스> 창작에 돌입하기 전 이 장면만 따로 떼어 지인들에게 보였을 정도였다. 볼테르는 왜 이 장면에 주목했을까?
소포클레스는 이 장면을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모자 관계를 암시하는 장치로 썼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의 오만한 천성에 내려진 벌로 묘사했지만 볼테르는 여기서 신의 잔인한 면모를 봤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는 무서운 운명을 피해 보려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게 될까 두려워 조국을 떠나 방랑했고, 이오카스테는 아들과 상간하게 될까 두려워 모성을 거두고 피눈물을 쏟으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은 무심하게도 둘을 기어이 예정된 운명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면 신의 말씀을 그대로 믿은 것이었다. 신을 믿은 대가로 파국을 맞은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원작과 가장 차별화되는 대목이자 볼테르의 반교권주의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극작가 볼테르
지금은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철학 콩트 ≪캉디드≫로 더 잘 알려진 볼테르는 사실 극작가로 가장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런 볼테르에게 <오이디푸스>는 데뷔작인 동시에 극작가로서 명성을 안겨 준 첫 흥행작이었다. 이후로 볼테르는 극작품 52편을 남긴다. 코르네유와 라신이 평생 쓴 비극보다도 많다. 볼테르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도 극작가로서 명성 덕분이었다. 단순히 많은 작품을 쓴 데만 그치지 않았다. 볼테르의 작품들은 흥행 성적도 좋았다. 1680년 이후 150년간 프랑스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작품들을 통틀어 가장 흥행한 작품 1위부터 6위까지가 모두 볼테르의 것이었다. 특히 데뷔작 <오이디푸스>의 성공 이후 볼테르는 ‘아루에’라는 본명을 버리고 필명 ‘볼테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문필가로서 볼테르가 <오이디푸스>와 함께 탄생한 것이다.
그가 극을 쓸 당시 프랑스 연극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전 시기에 유행한 고전주의적 규칙을 따르되 합리적으로 적절히 변형하는 흐름과 고전주의를 완전히 거부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는 흐름이었다. 볼테르는 고전주의 규칙을 엄격히 따르면서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극을 구성했다. 무엇보다 주제가 효과적으로 강조된 고전의 ‘단순성’을 본받고자 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 않고 오직 중심 주제에 집중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볼테르가 말하는 고전의 ‘단순성’이었고 미덕이었다. <오이디푸스>는 바로 그런 고전의 단순성을 최고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저자소개

본명이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ois-Marie Arouet)인 볼테르는 1694년 11월 21일 파리의 공증인인 프랑수아 아루에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711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고 사교계에 드나들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717년, 섭정 오를레앙 공작에 대한 풍자시 때문에 11개월 동안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 그는 아루에 드 볼테르(Arouet de Voltaire)라는 필명으로 첫 비극 <오이디푸스(Oedipe)>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1745년, 볼테르는 왕실 사료편찬관으로 임명되었고, 1746년에는 오랫동안 소원해 왔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풍자를 즐기는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애써 얻은 궁정의 지위는 다시 위태로워졌다. 게다가 1749년에는 애인이자 친구인 샤틀레 부인이 젊은 애인 생 랑베르의 딸을 낳자마자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볼테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의 초청을 받아들여 1750년 베를린으로 갔다. 1778년 2월 10일, 볼테르는 파리를 떠난 지 약 28년 만에 비극 <이렌(Ir?ne)>을 상연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를 위한 행사가 연일 열렸고, 그를 만나려는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그의 마지막 비극 작품인 <이렌>은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한 흥분과 무리한 활동 때문에 건강을 해쳐 1778년 5월 3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목차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4막

5막

해설

지은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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